글수 315
05
2007.02
2007.02
인형
// Document: http://csi00.net/zbxe/23465 2007.02.05 00:51:41 (*.85.157.15) Category: 연재1427 Views
날씨는 맑았다. 미풍이 살살 뺨을 간지럽혔다. 공원의 푸른 나뭇잎들이 시원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고, 청년은 생각했다. 차닥차닥, 살짝 습기찬 바닥을 가볍게 밟으면서 쭉 나아가면, 나무 벤치 몇 개가 늘어선 길이 보이고, 그 중에는 분명─
"아."
딱히 바랐던 건 아니지만,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터였다. 어느 정도 사람들이 앉아있는 곳을 피해 나무 그늘이 많이 드리워진 구석에, 웃지 않는 소녀. 검은 머리는 살짝 어깨 앞으로 늘어뜨리고, 등받이에 기대서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는 인형 같은 소녀. 청년은 피식 웃었다. 며칠 전부터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자세로 앉아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청년은 걸음 속도를 좀 더 늦춰, 천천히 천천히 그 벤치에 다가갔다. 그리고 약간의 거리를 두고, 인형 같은 얼굴이 서서히 자신을 돌아볼 때까지 기다렸다. 눈이 마주치면─아니 사실 슬쩍 시선을 던진 것뿐이라도─그것은 옆에 있어도 좋다는 허락으로 받아들인다. 고마워요. 청년은 속으로 인사했다.
의자에 같이 앉은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소녀는 역시 인형처럼 가만히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
지저분한 골목이 황혼으로 접어들어가자 청년은 서둘러 돌아갈 준비를 했다. 시체가 영구차에 실려나가는 것을 보는 것까지가 오늘 그의 임무였다. 그 다음 일은 CSI 요원의 역할이다. 호기심과 열정이 넘치는 나이라 그런지 처음엔 사건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순찰 대원으로써 애를 먹었으나, 이제는 스스로 상당히 익숙해졌다고 여겼다. 어서 돌아가자─ 이제 이쪽과는 상관 없는 일이 되어버렸으니까. 그는 쓰윽 한번 영구차에 눈길을 주고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걸음은 얼마 안 가 멈추고 말았다.
소녀는 지저분한 골목의 지저분한 벽에 바짝 붙어 쭈그려 앉은 채였다. 검은 머리가 아무렇게나 늘어지고, 쪼그린 자세 때문인지 작은 체구가 더욱 왜소해 보였다. 그 시선은 특정한 곳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저 멍하니. 인형 같다. 청년은 생각했다.
"저기, 실례합니다."
청년은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혹시 피해자와 관계 있는 분이시라면……."
소녀가 일어섰다. 청년은 순간 인형이 일어섰다, 는 착각에 빠져 놀라고 말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소녀는 비척비척 지저분한 골목길을 돌아서 사라졌다. 잡아야 할까, 생각했지만 청년은 움직이지 않았다. 잡아서 신원 조사를 해야 했던 건지도 모르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뿐이었다.
.
오랜만에 나와 본 공원이었다. 아침에 조깅이라니 순찰 경관이 된 후 그만둔 지 오래였지만, 오랜만의 비번이고 하니 상쾌한 공기라도 쐬고 오자는 생각에서였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이곳은 정말 끝내주는 기후야. 바다가 근접한 지역이라 바닷바람이 자주 불어온다. 그는 일년 내내 지속되는 이 따뜻한 날씨와 환한 태양을 좋아했다. 특히 녹색식물이 많은 곳이면 더욱 그랬다. 감수성이 많다거나 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항상은 아니어도 가끔 피비린내 나는 시체들도 상대해야 하는 직업에서 푸른 향내를 맡는 기회에 기뻐한다는 게 어찌 이상한 일이겠는가. 사람이 그다지 많이 몰리는 편이 아닌 길목을 가볍게 뜀박질하고 있으면, 기분이 상쾌해짐을 부인할 수 없었다.
청년은 잠깐 발을 멈추고 가까운 나무 벤치에 앉았다. 직접 내리쬐는 태양광이 눈부시다. 빛을 피해 살짝 고개를 돌린 그는 한 칸 떨어진 벤치에 익숙한 형태를 보았다.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검은 머리, 조금도 꼼짝하지 않는 자세, 초점을 잃은 멍한 시선…… 그 인형 같은 얼굴. 청년은 어느새 일어서서 소녀에게 다가서는 자신을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소녀는 눈을 돌려 청년을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억 안 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고 청년은 생각했다.
"어제 8번지에서 만났었죠?"
이미 여자를 몇 번 만나본 경험이 있는 게 당연한 나이인지라 상당한 입담을 자랑했지만, 소녀는 한 마디 대답도 않았고, 심지어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보통 이 정도라면 남자는 여자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판단, 알아서 물러가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청년은 지치지도 않고 옆에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는, 인형이 웃는 것을 보고 싶었다.
.
"─정말 놀랐다니까요. 아무리 부검이 처음이었다곤 해도. 사람 몸에 칼을 대는 걸 직접 지켜보는 건 영 내키지가 않아요."
청년은 요 며칠 간 이야기를 하면서 소녀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었다. 여전히 웃거나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시선을 맞추고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등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활력을 받아서 열심히 이야기를 했다. 이상하게 지루하다거나 느껴지는 일은 없었다. 조금씩 조금씩 이쪽에 눈길을 던져주는 그 과정이 신기하고, 또 기뻤을 따름이었다. 관심이 아닌지도 모른다. 단지 소리에 반응한 것뿐일지도. 그렇더라도, 그 '반응'이 기뻤다.
"그랬는데─."
"…왜요?"
"네?"
청년은 깜짝 놀라서 소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 목소리는 이 사람한테 나온 게 맞는 것인가?
"왜 계속 와요?"
"…싫으셨어요?"
"……."
소녀는 또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청년은 싱긋 웃고서 말했다.
"제가 싫으셨다면 같은 곳 같은 시간에 계시지 않았겠죠? 그래서 계속 왔어요."
"…왜 계속 말을 걸어주는 거예요?"
"그건……"
청년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인형 같아서요."
"네?"
"그쪽이 인형 같아서요."
차마 웃는 게 보고 싶어서, 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좀 변태 같잖아? 라고 여기는 그였지만, '인형 같다'라는 말도 어찌 보면 비정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풋."
청년은 순간 눈과 귀를 의심했다.
"뭐예요…, 그게."
'아… 웃었다.'
소녀는 입을 가리고 큭큭거렸다. 청년의 입에서도 웃음이 흘러나왔다. 한동안 두 사람은 작게 웃었다.
.
청년은 나지막하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달렸다. 원래 이 시간 담당인 선배 경관이 이번 한 번만 부탁한다며─말이 좋아 부탁이지 사실 협박이다─교대를 청했던 것이다. 교대라고 해도 나중에 그 선배가 정말 교대를 해 줄지는 미지수인데다 슬슬 해가 지고 있다는 특수한 상황 탓에 임무는 훨씬 고달퍼졌다. 그는 팔을 문질렀다. 어쩐지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마이애미에서는 있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황혼녘의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고 돌았다. 아까 집에서 편안히 간식으로 즐기던 아이스크림이 선배 경관의 교대 요청 때문에 체한 탓일까. 아니면, 며칠 전부터 나오지 않는 소녀가 마음에 걸리기 때문인 걸까.
달리기 속도가 느려졌다. 처음으로 소녀가 웃은 그 날 후에도 며칠 간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소녀는 큰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웃는 일이 조금 있었고, 이야기도 했다. 그래서, 소녀의 빈자리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약속 같은 건 한 적이 없었다. 그 시각에 그 장소로 가면 있을 거라고 내심 믿고 있었다. 청년은 그 때 소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심지어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러니 소녀가 나오지 않은 이유는 다양할 수 있었다. 그 시간에 용무가 생겼다든가, 이사를 했다든가, 아니면 단순히 더 이상 나오기 싫어진 것뿐일지도……. 청년은 머리를 저었다. 조금 더 달리자. 열기가 올라와 몸을 덥혀줄 것이다.
그는 곧 방파제에 이르렀다. 그 때까지도 기이한 냉기는 사라질 줄 몰랐다. 상당한 거리를 달려왔기 때문에 숨이 턱까지 찼다. 걷기로 결심한 청년은 이리저리 손전등을 돌리며 나아갔다. 해가 거의 다 져 가면서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바다에서의 밤은 도시보다 천천히 찾아오지만 도시보다 어둠이 훨씬 깊다. 손전등의 미약한 빛 따위는 금새 검은 파도에 휩쓸리고 만다. 바다를 향했던 라이트를 방파제 바위로 돌리고 걸었다. 철썩, 철썩. 파도가 거세게 육지를 덮으려 들었다. 철썩, 철썩. 바위 사이사이에 지저분하게 쓰레기가 버려져 있다. 철썩, 철썩. 점점 검어지는 파도가 지우려는 듯이 달려든다. 철썩, 철썩. 파도가 지우려는 것을, 손전등의 불빛이 반사해낸다. 그 붉은 색을…….
시간이 조금 지난 후 청년이 서 있는 위치는 소녀보다 좀 멀찍이 떨어진 곳이었다. 상당히 익숙한 DO NOT CROSS란 의미의 노란 띠가 그녀의 주위를 둘러쳤다. 첫번째 발견자인 그에게 형식적인 질문이 던져졌고, 역시 형식적인 대답이 돌아갔다. 벌써 현장 조사를 마친 CSI 요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사인은 강한 충격에 의한 내출혈이야."
"바위에 뇌수가 있어. 방파제에 부딪혀 사망했다고 보는 게 가장 타당하겠군."
"사고일까?"
"아직 모르겠어."
청년은 자신도 모르게 노란 선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하지만 세 발짝도 못 가서 그는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그의 '임무'는, 여기서 끝이었던 것이다.
.
예쁜 소녀였다.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 하지만 그 예쁜 눈엔 초점이 없었다. 호레이시오 케인 반장은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 아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예쁘구나. 틀림없이 예쁘게 웃을 수도 있었겠지. 이제 그럴 수 없겠구나. 언제나 그는 제 수명에 죽지 못한 'victims'를 응시하며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은 욕구를 누르곤 했다. 그것은 검시관인 알렉스 우즈의 몫이었다.
"예쁜 아가씨, 아직 이렇게 어린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알렉스는 소녀의 머리칼을 살짝 쓰다듬고선 직원들이 데려가도록 비켜주었다.
"별로 발견한 게 없다고 들었어, 호레이시오."
"힘들기야 하겠지. 하지만……"
그는 노란 선 너머 이쪽을 응시하는 젊은 순찰 경관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반드시, 밝혀낼 거야."
.
청년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 건지 몰랐다. 그래서 물었다. 뻔한 대답이 되돌아왔다. 순찰 경관의 임무는 끝.
"남아있으면 안 됩니까?"
"뭐라고?"
"어떻게 되어가는지…… 보고 싶습니다. 남아서 돕고 싶어요."
"무슨 소릴 하고 있나? 자넨 CSI가 아니야."
그랬지. 스스로 조소한다. 소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새삼 사무친다. 남아서, 지켜봐서, 어쩌겠다는 걸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를 알아낸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언제나처럼 이제 상관없으니까, 하며 돌아서면 그만이었다. 헌데, 언제나처럼 발걸음을 재촉하지 못하는 건 왜?
처음엔 어땠더라. 까만 머리를 아무렇게나 늘어뜨리고서, 양팔을 꼬옥 붙잡고 웅크려 있었다. 그대로 사라지길 바란다는 듯이. 그리고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까만 눈동자는 초점을 맞추지 못했고, 인형처럼 웃지 않는 얼굴. 그래, 인형. 그녀는 이제 진짜 인형이 되어버렸다.
「뭐예요…, 그게」
어라…… 어라. 아닌데.
「뭐예요…, 그게」
그래, 아니야.
알고 있었다. 소녀는 인형이 아니었다.
.
"반장님,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에. 살라스 형사 말로는 자네가 이직을 하고 싶어한다고?"
"예."
"순찰 경관이 싫은 건가?"
"그것도 좋지만 끝까지 사건을 따라다니진 않습니다. CSI에서는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놓지 않죠. 희생자들이…… 묻힐 때까지."
"좋아, 자넨 지금 막 고용되었네. 이 순간부터 근무 개시니 당장 시작하게."
─청년은 라커에 자기 이름이 붙여진 것을 보았다.
새로운 동료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그의 목소리는 당당했다.
"라이언 울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P.S.
라이언 군이 소녀를 두 번째로 만난 공원에서, 아침 공기를 쐬려고 나왔다는 건전한 사고는 본인만의 생각이고, 사실 오랜만의 비번에 스케줄이 잡혀있지 않은 비극적인 상황에서 외출을 한 번만이라도 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본심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아."
딱히 바랐던 건 아니지만,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터였다. 어느 정도 사람들이 앉아있는 곳을 피해 나무 그늘이 많이 드리워진 구석에, 웃지 않는 소녀. 검은 머리는 살짝 어깨 앞으로 늘어뜨리고, 등받이에 기대서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는 인형 같은 소녀. 청년은 피식 웃었다. 며칠 전부터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자세로 앉아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청년은 걸음 속도를 좀 더 늦춰, 천천히 천천히 그 벤치에 다가갔다. 그리고 약간의 거리를 두고, 인형 같은 얼굴이 서서히 자신을 돌아볼 때까지 기다렸다. 눈이 마주치면─아니 사실 슬쩍 시선을 던진 것뿐이라도─그것은 옆에 있어도 좋다는 허락으로 받아들인다. 고마워요. 청년은 속으로 인사했다.
의자에 같이 앉은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소녀는 역시 인형처럼 가만히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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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저분한 골목이 황혼으로 접어들어가자 청년은 서둘러 돌아갈 준비를 했다. 시체가 영구차에 실려나가는 것을 보는 것까지가 오늘 그의 임무였다. 그 다음 일은 CSI 요원의 역할이다. 호기심과 열정이 넘치는 나이라 그런지 처음엔 사건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순찰 대원으로써 애를 먹었으나, 이제는 스스로 상당히 익숙해졌다고 여겼다. 어서 돌아가자─ 이제 이쪽과는 상관 없는 일이 되어버렸으니까. 그는 쓰윽 한번 영구차에 눈길을 주고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걸음은 얼마 안 가 멈추고 말았다.
소녀는 지저분한 골목의 지저분한 벽에 바짝 붙어 쭈그려 앉은 채였다. 검은 머리가 아무렇게나 늘어지고, 쪼그린 자세 때문인지 작은 체구가 더욱 왜소해 보였다. 그 시선은 특정한 곳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저 멍하니. 인형 같다. 청년은 생각했다.
"저기, 실례합니다."
청년은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혹시 피해자와 관계 있는 분이시라면……."
소녀가 일어섰다. 청년은 순간 인형이 일어섰다, 는 착각에 빠져 놀라고 말았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소녀는 비척비척 지저분한 골목길을 돌아서 사라졌다. 잡아야 할까, 생각했지만 청년은 움직이지 않았다. 잡아서 신원 조사를 해야 했던 건지도 모르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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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나와 본 공원이었다. 아침에 조깅이라니 순찰 경관이 된 후 그만둔 지 오래였지만, 오랜만의 비번이고 하니 상쾌한 공기라도 쐬고 오자는 생각에서였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이곳은 정말 끝내주는 기후야. 바다가 근접한 지역이라 바닷바람이 자주 불어온다. 그는 일년 내내 지속되는 이 따뜻한 날씨와 환한 태양을 좋아했다. 특히 녹색식물이 많은 곳이면 더욱 그랬다. 감수성이 많다거나 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항상은 아니어도 가끔 피비린내 나는 시체들도 상대해야 하는 직업에서 푸른 향내를 맡는 기회에 기뻐한다는 게 어찌 이상한 일이겠는가. 사람이 그다지 많이 몰리는 편이 아닌 길목을 가볍게 뜀박질하고 있으면, 기분이 상쾌해짐을 부인할 수 없었다.
청년은 잠깐 발을 멈추고 가까운 나무 벤치에 앉았다. 직접 내리쬐는 태양광이 눈부시다. 빛을 피해 살짝 고개를 돌린 그는 한 칸 떨어진 벤치에 익숙한 형태를 보았다.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검은 머리, 조금도 꼼짝하지 않는 자세, 초점을 잃은 멍한 시선…… 그 인형 같은 얼굴. 청년은 어느새 일어서서 소녀에게 다가서는 자신을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소녀는 눈을 돌려 청년을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억 안 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고 청년은 생각했다.
"어제 8번지에서 만났었죠?"
이미 여자를 몇 번 만나본 경험이 있는 게 당연한 나이인지라 상당한 입담을 자랑했지만, 소녀는 한 마디 대답도 않았고, 심지어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보통 이 정도라면 남자는 여자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판단, 알아서 물러가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청년은 지치지도 않고 옆에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는, 인형이 웃는 것을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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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놀랐다니까요. 아무리 부검이 처음이었다곤 해도. 사람 몸에 칼을 대는 걸 직접 지켜보는 건 영 내키지가 않아요."
청년은 요 며칠 간 이야기를 하면서 소녀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었다. 여전히 웃거나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시선을 맞추고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등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활력을 받아서 열심히 이야기를 했다. 이상하게 지루하다거나 느껴지는 일은 없었다. 조금씩 조금씩 이쪽에 눈길을 던져주는 그 과정이 신기하고, 또 기뻤을 따름이었다. 관심이 아닌지도 모른다. 단지 소리에 반응한 것뿐일지도. 그렇더라도, 그 '반응'이 기뻤다.
"그랬는데─."
"…왜요?"
"네?"
청년은 깜짝 놀라서 소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 목소리는 이 사람한테 나온 게 맞는 것인가?
"왜 계속 와요?"
"…싫으셨어요?"
"……."
소녀는 또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청년은 싱긋 웃고서 말했다.
"제가 싫으셨다면 같은 곳 같은 시간에 계시지 않았겠죠? 그래서 계속 왔어요."
"…왜 계속 말을 걸어주는 거예요?"
"그건……"
청년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인형 같아서요."
"네?"
"그쪽이 인형 같아서요."
차마 웃는 게 보고 싶어서, 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좀 변태 같잖아? 라고 여기는 그였지만, '인형 같다'라는 말도 어찌 보면 비정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풋."
청년은 순간 눈과 귀를 의심했다.
"뭐예요…, 그게."
'아… 웃었다.'
소녀는 입을 가리고 큭큭거렸다. 청년의 입에서도 웃음이 흘러나왔다. 한동안 두 사람은 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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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은 나지막하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달렸다. 원래 이 시간 담당인 선배 경관이 이번 한 번만 부탁한다며─말이 좋아 부탁이지 사실 협박이다─교대를 청했던 것이다. 교대라고 해도 나중에 그 선배가 정말 교대를 해 줄지는 미지수인데다 슬슬 해가 지고 있다는 특수한 상황 탓에 임무는 훨씬 고달퍼졌다. 그는 팔을 문질렀다. 어쩐지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마이애미에서는 있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황혼녘의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고 돌았다. 아까 집에서 편안히 간식으로 즐기던 아이스크림이 선배 경관의 교대 요청 때문에 체한 탓일까. 아니면, 며칠 전부터 나오지 않는 소녀가 마음에 걸리기 때문인 걸까.
달리기 속도가 느려졌다. 처음으로 소녀가 웃은 그 날 후에도 며칠 간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소녀는 큰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웃는 일이 조금 있었고, 이야기도 했다. 그래서, 소녀의 빈자리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약속 같은 건 한 적이 없었다. 그 시각에 그 장소로 가면 있을 거라고 내심 믿고 있었다. 청년은 그 때 소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심지어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러니 소녀가 나오지 않은 이유는 다양할 수 있었다. 그 시간에 용무가 생겼다든가, 이사를 했다든가, 아니면 단순히 더 이상 나오기 싫어진 것뿐일지도……. 청년은 머리를 저었다. 조금 더 달리자. 열기가 올라와 몸을 덥혀줄 것이다.
그는 곧 방파제에 이르렀다. 그 때까지도 기이한 냉기는 사라질 줄 몰랐다. 상당한 거리를 달려왔기 때문에 숨이 턱까지 찼다. 걷기로 결심한 청년은 이리저리 손전등을 돌리며 나아갔다. 해가 거의 다 져 가면서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바다에서의 밤은 도시보다 천천히 찾아오지만 도시보다 어둠이 훨씬 깊다. 손전등의 미약한 빛 따위는 금새 검은 파도에 휩쓸리고 만다. 바다를 향했던 라이트를 방파제 바위로 돌리고 걸었다. 철썩, 철썩. 파도가 거세게 육지를 덮으려 들었다. 철썩, 철썩. 바위 사이사이에 지저분하게 쓰레기가 버려져 있다. 철썩, 철썩. 점점 검어지는 파도가 지우려는 듯이 달려든다. 철썩, 철썩. 파도가 지우려는 것을, 손전등의 불빛이 반사해낸다. 그 붉은 색을…….
시간이 조금 지난 후 청년이 서 있는 위치는 소녀보다 좀 멀찍이 떨어진 곳이었다. 상당히 익숙한 DO NOT CROSS란 의미의 노란 띠가 그녀의 주위를 둘러쳤다. 첫번째 발견자인 그에게 형식적인 질문이 던져졌고, 역시 형식적인 대답이 돌아갔다. 벌써 현장 조사를 마친 CSI 요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사인은 강한 충격에 의한 내출혈이야."
"바위에 뇌수가 있어. 방파제에 부딪혀 사망했다고 보는 게 가장 타당하겠군."
"사고일까?"
"아직 모르겠어."
청년은 자신도 모르게 노란 선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하지만 세 발짝도 못 가서 그는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그의 '임무'는, 여기서 끝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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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소녀였다.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 하지만 그 예쁜 눈엔 초점이 없었다. 호레이시오 케인 반장은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 아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예쁘구나. 틀림없이 예쁘게 웃을 수도 있었겠지. 이제 그럴 수 없겠구나. 언제나 그는 제 수명에 죽지 못한 'victims'를 응시하며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은 욕구를 누르곤 했다. 그것은 검시관인 알렉스 우즈의 몫이었다.
"예쁜 아가씨, 아직 이렇게 어린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알렉스는 소녀의 머리칼을 살짝 쓰다듬고선 직원들이 데려가도록 비켜주었다.
"별로 발견한 게 없다고 들었어, 호레이시오."
"힘들기야 하겠지. 하지만……"
그는 노란 선 너머 이쪽을 응시하는 젊은 순찰 경관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반드시, 밝혀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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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 건지 몰랐다. 그래서 물었다. 뻔한 대답이 되돌아왔다. 순찰 경관의 임무는 끝.
"남아있으면 안 됩니까?"
"뭐라고?"
"어떻게 되어가는지…… 보고 싶습니다. 남아서 돕고 싶어요."
"무슨 소릴 하고 있나? 자넨 CSI가 아니야."
그랬지. 스스로 조소한다. 소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새삼 사무친다. 남아서, 지켜봐서, 어쩌겠다는 걸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를 알아낸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언제나처럼 이제 상관없으니까, 하며 돌아서면 그만이었다. 헌데, 언제나처럼 발걸음을 재촉하지 못하는 건 왜?
처음엔 어땠더라. 까만 머리를 아무렇게나 늘어뜨리고서, 양팔을 꼬옥 붙잡고 웅크려 있었다. 그대로 사라지길 바란다는 듯이. 그리고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까만 눈동자는 초점을 맞추지 못했고, 인형처럼 웃지 않는 얼굴. 그래, 인형. 그녀는 이제 진짜 인형이 되어버렸다.
「뭐예요…, 그게」
어라…… 어라. 아닌데.
「뭐예요…, 그게」
그래, 아니야.
알고 있었다. 소녀는 인형이 아니었다.
.
"반장님,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에. 살라스 형사 말로는 자네가 이직을 하고 싶어한다고?"
"예."
"순찰 경관이 싫은 건가?"
"그것도 좋지만 끝까지 사건을 따라다니진 않습니다. CSI에서는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놓지 않죠. 희생자들이…… 묻힐 때까지."
"좋아, 자넨 지금 막 고용되었네. 이 순간부터 근무 개시니 당장 시작하게."
─청년은 라커에 자기 이름이 붙여진 것을 보았다.
새로운 동료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그의 목소리는 당당했다.
"라이언 울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P.S.
라이언 군이 소녀를 두 번째로 만난 공원에서, 아침 공기를 쐬려고 나왔다는 건전한 사고는 본인만의 생각이고, 사실 오랜만의 비번에 스케줄이 잡혀있지 않은 비극적인 상황에서 외출을 한 번만이라도 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본심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와아ㅠㅠㅠㅠ 멋진 글. 문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부터가 이미 예사롭지 않으십니다. 요즘 바쁘다고 간만에 들렀더니, 며칠 늦어버린 코멘이지만. 후훗. 잘 읽었어요. 앞으로도 많이 많이 써주세요>_<
2007.02.09 03:50:13
붉은 색의 십자 표시가 달려 있는 걸 보는 기쁨이란...ㅠ_ㅠ
간디바 님 // 라이언은 자신감도 있고 혈기 넘치는 행동파 청년이죠. 아무 일 없었대도 언젠가는 CSI가 되었겠지만 촉발제가 있지 않았을까-라는 상상에서 나온 소설입니다^^ 그 촉발제는 인간적인 면에서 나온 감정이라는 설정! 크~ 라이언 군 멋지지 않습니까!!<-
C.L. 님// ...;; (인형 같다는 설정도 까만 머리라는 설정도 아무렇게나 써내려가다 보니까 어쩌다 나온 묘사법이라고는 절대 말 못해...)
간디바 님 // 라이언은 자신감도 있고 혈기 넘치는 행동파 청년이죠. 아무 일 없었대도 언젠가는 CSI가 되었겠지만 촉발제가 있지 않았을까-라는 상상에서 나온 소설입니다^^ 그 촉발제는 인간적인 면에서 나온 감정이라는 설정! 크~ 라이언 군 멋지지 않습니까!!<-
C.L. 님// ...;; (인형 같다는 설정도 까만 머리라는 설정도 아무렇게나 써내려가다 보니까 어쩌다 나온 묘사법이라고는 절대 말 못해...)
2007.02.19 02:27:16
와아 라이언의 비하인드 스토리군요(헤에에~) 역시 호반장님은 괜히 라이언을 뽑은게 아니에요!! 그 이유를 밝혀주시다니 Maria님 대단해요~>ㅁ<
2007.03.09 22:40:13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수고하세요!